영화 <컨텍트, Arrival>를 봤다. 다른 책에서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꾼 인생 영화라고 언급해서 보게 된 영화. 영화는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들을 탐색하고 대응하기 위해 한 물리학자와 언어학자를 파견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세지는 두 가지 학문 분야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파견된 학자들의 분야에서 유추가능하듯 물리학과 언어학이다. 

 

지구에 온 외계인들을 다리가 7개라는 의미로 헵타포드(Hepta = 일곱, pod = 다리)라고 부르는데, 이 헵타포드들은 표의어를 사용한다. 즉, 마치 중국어 한자처럼 문자가 음이 아닌 의미를 바탕으로 한다. 이들 언어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시제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시간은 흐른다'는 개념이 없다. 과거에서 미래로의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을 가진 인간들의 언어에는 '~했다(did)', '~한다, 하고 있다(do, be doing)', '~할 것이다(will do)' 등의 다양한 시제가 있지만 이들의 언어에는 없다. 이들이 인지하는 시간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개념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이다. 

 

다중우주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려는 그림

 

이러한 개념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시간은 블록 우주(block universe, "시공간에서의 모든 사건이 하나의 장에 찍힌 점이다") 개념에 따라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와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경험되며(시간의 고유성), 또 과거, 현재, 미래가 시공간에 고정된 점들처럼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은 단지 인지적 환영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영화를 보며 예전에 선물 받아 읽다가 머리에 쥐날 것 같아서 포기하고 넣어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꺼내봤다.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시간에 대한 현대의 시각을 굉장히 쉽게 (써도 어렵지만 감은 잡을 수 있다) 쓴 책이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방정식은 딱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놀랍도록 추상적인 개념을 여러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려 한 로벨리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동시에 존재한다. 헵타포드들의 시간 인지 방식처럼.

 

또 시제가 없는 언어를 이해하게 된 언어학자 주인공이 그들처럼 과거와 미래를 다른 개념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인지하고 미래를 '예측'이 아닌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언어 결정론(linguistic theory)를 바탕으로 한다. 이거 때문에 마침 저번주 도서관에서 빌려왔다가 처박아뒀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소개서를 꺼내봤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이 언어 결정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을 책의 서두에서 읽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된 언어 결정론 이론 사피어-워프 이론은 이러한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에 읽은 <어른의 어휘력> 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또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하고 신기했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면 좋은 배경지식을 찾다가 이렇게 여러 책들을 읽게 되고, 지식들이 연결되며 이를 통해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특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개념, 그리고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주요 두 이론은 나의 현재 고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우선 진로 고민이 많은 이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관점을 다르게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여러 평행 우주 중 하나의 정해진 미래가 있다면. 진로 고민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정해진 미래는 있다면?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얼 올엣원스> 처럼 다중우주의 여러가지 버전의 미래 지점은 이미 존재하고, 그저 현재의 선택이 그곳을 찾아간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 '안다'고 인지한다면? 터무니 없어도 좋다. 그러나 이 관점은 내게 신선할 뿐 아니라 유용하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된 것 만으로도 현재의 불안이 많이 줄어들었니. 이미 네가 그리는 미래는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고, 어느 미래가 될지는 결국 지금 현재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냥 너는 현재와 미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걸어나가면 된다. 

 

 

“If you could see your whole life from start to finish, would you change things?”

 

 

또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관점을 다른 층위, 즉 물리학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언어학자가 딸을 잃는 장면이 등장한다. 관중들은 이 장면으로 언어학자가 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것은 사실 '과거'의 일이 아닌,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하며 알게된 언어학자의 '미래' 시점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진행 시점 기준, 언어학자에게 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에 그녀는 함께한 물리학자와 사랑에 빠지고 딸을 하나 얻지만, 그는 그녀를 떠나고 딸마저 어린 나이에 암으로 그녀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다. 당신은 이를 안다고 해도 그 삶을 살아나가겠는가? 길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걷지 않으면 결국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선택이다. 이 장면은 언어학자에게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같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 엄청난 상실의 아픔을 현재에도 실감함에도 그녀가 그 길을 걷겠다고 생각한 것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미래 뿐 아니라 현재에도 과거에도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아직 만나지 않은 딸을 사랑했다. 고통 뿐 아니라 미래에 그녀를 사랑한 마음 역시 현재에 실존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를 선택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 고통스러울 것을 알아도 그것을 선택하게 하는가?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답이 없고 현학적인 질문이라 생각해 마음 속 구석에 처박아 놨었다. 이 질문을 다시 꺼내보며 어떤 질문들은 답이 없고 실용적이지 못할 지언정,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개인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시킨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설익은 철학을 바탕으로 온몸으로 20대를 경험해 나가는 구재희씨가 말한다. "사랑은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데, '보고 싶다'는 참 명확해." 이 두 영화를 보고 난 뒤 지금 내게 사랑을 묻는다면 다음과 같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당신이 보고 싶은 것. 시공간과 관계없이 여전히 당신을 향한 마음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것. 그래서 다른 시공간 속에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옆에 있다고 느껴지고, 느낌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고자 기꺼이 만나러 가게 되는 것.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시애틀에 산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약 8,700km 정도의 공간차와 1000분의 몇 초쯤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2년 전 보낸 나의 첫 강아지 역시 여전히 옆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미래라 여겨지는 시공간의 인연들을 감히 말하건대 사랑한다. 현재와 미래와 과거가 다르지 않고, 이곳이 저곳과 다르지 않으며, 나와 남이 결국 하나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이 마음이 지금은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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